사건이 있었던 연도 순으로 다시 늘어놓았다.

2016년 10월 24일 저녁, 텔레비전 앞에 앉은 시청자들은 JTBC 뉴스에서 '최순실 PC파일 입수'라는 제목의 보도를 마주했다. 그날 JTBC는 여덟 건의 단독 기사를 한꺼번에 내놓았고, 그중 하나는 대통령 연설문이 발표되기 전에 민간인 최순실씨가 그 연설문을 먼저 받아봤다는 내용이었다. 이 글은 하나의 질문을 따라간다. 그날 저녁의 보도는 어떻게 광장까지 이어졌고, 그 시작이었다는 태블릿PC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화면에는 드레스덴 연설문 이야기가 나왔다. 2014년 3월 28일 발표된 이른바 '통일대박론' 연설문이 하루 전인 3월 27일 최씨의 컴퓨터에서 열람됐고,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실제 연설에서 빠지거나 바뀐 대목이라는 것이었다. 공식 직함이 없는 민간인이 국가 정상의 연설문을 먼저 읽었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런데 보도는 열람 날짜와 연설문에 남은 붉은 표시까지 구체적으로 짚고 있었다. JTBC의 설명에 따르면 발단은 엿새 전인 10월 18일이었다. 취재팀이 건물관리인과 함께 서울 강남 신사동의 한 사무실에 들어갔다. 최씨의 차명회사로 추적된 더블루K가 쓰던 곳인데, 9월에 이미 이사를 나가 책상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 책상에서 월세 계약서와 사업자등록증, 해외 협회와의 계약서, 그리고 전원이 꺼진 태블릿PC 한 대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 사무실까지 가게 된 경위도 JTBC는 설명했다. 10월 3일 특별취재팀을 꾸려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과 고영태 더블루K 이사를 차례로 만났고, 거기서 나온 업체명을 단서로 최씨의 차명회사를 쫓았다. 독일 기업 관련 보도와 기업 사이트에서 같은 주소가 확인된 것이 신사동 사무실로 이어졌다. 기기는 2012년에서 2014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였고, 충전케이블을 구하기 어려워 취재진이 직접 샀다. 누군가에게 건네받은 것 아니냐는 의심에는 JTBC가 분명히 선을 그었다. 증거인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기기를 가져와 정밀 분석했고, 첫 보도가 나간 10월 24일 검찰에 제출했다는 것이 JTBC의 설명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JTBC 쪽 설명이다. 사무실에 들어간 경위도, 기기를 발견한 순간도 보도한 쪽의 말로만 전해졌다. 훗날의 공방은 상당 부분 이 대목에서 출발한다. 반면 다음 날 벌어진 일은 누구의 설명도 거칠 필요가 없었다.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보도가 나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대통령은 최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을 도움 받은 적이 있다 보도의 핵심 가운데 일부를 대통령 본인이 하루 만에 인정한 셈이었다. 후속 보도는 이어졌다. JTBC가 확보한 파일은 200여 건이었고, 그중 연설문이나 공식 발언 형태가 44개였다. 대선 후보 시절 유세문부터 취임 후 연설문, 당선인 소감문까지 섞여 있었다. 국무회의 자료와 청와대 인사 관련 문건도 사전에 전달된 정황이 보도됐고, 최씨가 파일을 연 시점이 대통령의 실제 발언보다 길게는 사흘 앞선 경우도 있었다. 사과 나흘 뒤인 10월 29일 토요일, 서울 도심에서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주최 측은 3만 명, 경찰은 1만 2000명으로 추산했다. 다음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서울에서만 20만 명이 모였고, 경찰 추산은 4만 7000명이었다. 집계는 이렇게 엇갈렸지만 어느 쪽을 기준으로 삼아도 참가자는 늘고 있었다. 11월 12일 3차 집회에서는 광화문 일대에 주최 측 추산 100만 명, 경찰 추산 26만 명이 모였다. 두 숫자는 네 배 가까이 차이 났다. 이날 저녁 6시 40분쯤 시위대 1000명가량이 청와대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청운동 새마을금고 앞까지 행진해 20분 가까이 앉아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다가, 경찰의 요청에 따라 경복궁역 쪽으로 돌아갔다. 청와대 코앞까지 간 첫 행진이었다. 토요일마다 집회가 이어졌다. 12월 3일 6차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서울 170만 명과 지방 62만 명, 합쳐서 232만 명이 모였다. 경찰 추산은 서울 32만 명, 지방 10만 9000명이었다. 이번에도 집계는 달랐고, 주최 측 기준으로는 집회가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12월 9일, 국회는 탄핵소추안을 표결에 부쳤다. 재적 300명 중 299명이 투표했고,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2표, 무효 7표로 가결됐다. 가결이 선포되자 국회 정문 앞에서 집회를 하던 시민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본회의장에서 표결을 지켜보던 세월호 유가족들은 눈물을 보였다. 대통령의 권한은 그 즉시 정지됐고, 황교안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았다. 탄핵 사유에는 청와대 문건 유출과 최씨의 국정 개입,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 강요, 세월호 참사 관련 직무 유기 등이 포함돼 있었다. 해를 넘겨 헌법재판소의 심리가 이어졌다. 2017년 3월 10일, 17차례의 변론 끝에 헌재가 선고를 내렸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세월호 관련 혐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3월 31일 구속됐고, 1심 징역 24년, 2심 징역 25년, 파기환송심 징역 20년을 거쳐 2021년 1월 14일 대법원이 확정했다. 앞서 공천개입 혐의로 확정된 징역 2년을 합쳐 총 22년이었다. 최씨도 국정농단 사건으로 징역 21년이 확정돼 복역 중이라는 보도가 2022년 2월에 나왔다. 그러나 태블릿PC를 둘러싼 질문은 탄핵과 판결로도 끝나지 않았다. 2017년 9월 19일, 검찰의 포렌식 보고서가 재판에 제출됐다. 작성일은 2016년 10월 25일, 분량은 689쪽이었다. 이어 그해 10월 8일에는 신혜원씨가 태블릿PC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었고, 10월 11일 국회 토론회에서는 조작설이 제기됐다. 대통령이 파면되고 구속까지 된 뒤에도 기기 자체의 소유와 사용을 둘러싼 다툼은 이어졌다. 입수 경위를 둘러싼 법적 공방도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던 JTBC 김필준 기자가 특수절도 혐의로 고발됐다. 건물관리인의 협조를 받아 들어갔고, 입수한 기기를 곧바로 검찰에 제출했다는 점 등을 들어 불법 침입과 불법영득의사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그러나 2018년 3월 서울고등검찰청은 이 사건의 재기수사를 명령했다. 2022년 2월 18일에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1부가 최서원(최순실)씨가 낸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검찰이 보관 중인 태블릿PC 한 대와 특검이 가진 한 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내용을 바꾸거나 폐기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이었다. 최씨는 그 기기를 소유하거나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재판부는 이 주장이 형사책임을 피하기 위한 거짓 진술일 수 있다고 봤다. 잠금 해제 패턴이 최씨의 휴대전화와 같다는 점, 최씨가 운영하던 사무실에서 발견됐다는 점을 근거로 최씨가 소유자가 아니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이 결정은 본안 판단이 나올 때까지 압수물을 지금 상태로 두라는 조치일 뿐이었다. 기기를 최씨에게 돌려줄지는 추가 변론과 증거조사를 거쳐 따로 판단할 문제로 남았다. 2016년 10월 18일 텅 빈 사무실의 책상 위에서 발견됐다는 그 기기는, 보도 6년이 지난 2022년에도 압수물로 보관된 채 법정 다툼의 한복판에 있었다.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 확정판결이 모두 끝난 뒤에도 입수 경위와 소유권 공방은 법원의 책상 위에 남아 있었다. 그날 저녁 텔레비전 앞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첫 조각만은, 끝내 다 설명되지 않은 채였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2016년 5월의 어느 날 그 좁은 통로 벽면은 노란색과 분홍색 포스트잇으로 뒤덮여 있었다. 손글씨로 눌러쓴 문장들이 벽 전체를 채웠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우연히 살아남았습니다", "조의를 표합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국화를 놓았고, 몇몇은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이 자발적인 추모 행렬은 며칠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추모의 대상이 된 사건을 두고, 정작 한국 사회는 정반대의 두 목소리로 갈라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여성혐오 범죄'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저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묻지마 범죄'일 뿐이라며 반박했다. 같은 사건, 같은 죽음을 놓고 왜 이토록 다른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사건은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상가 건물 지하에서 일어났다. 이 건물에는 노래방과 술집들이 있었고, 남녀 공용으로 쓰이던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그날 새벽, 30대 남성 한 명이 이 화장실에 들어가 흉기를 품고 오랜 시간 서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화장실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남성이 들어오면 그대로 보내고 여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몇 차례 기회를 흘려보낸 끝에,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한 여성이 화장실에 들어섰다. 그는 당시 23세로, 근처 술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으로 전해진다. 남성은 그를 향해 흉기를 휘둘렀다. 여성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사건 직후 경찰에 붙잡힌 남성은 도주하지 않고 현장 인근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 수사 단계에서 그는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온 이력이 있으며, 조현병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경찰은 이 부분에 주목해 사건을 '정신질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규정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초기 언론 보도 다수도 이 사건을 '강남역 묻지마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다뤘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진술한 범행 동기가 알려지면서, 사건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을 우습게 봐왔다는 취지의 말을 반복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왜 하필 화장실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 왜 남성이 아닌 여성이 들어오기만을 골라 기다렸는지에 대한 정황이 알려지자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즉각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이 죽음이 단순히 '운이 나빴던 사고'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표적이 됐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그가 남성들을 그냥 보내고 여성만을 기다렸다는 정황은, 많은 여성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날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이 자신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감각, 좁은 골목이나 늦은 밤 화장실에서 느껴온 막연한 불안이 처음으로 하나의 사건과 결합되는 순간이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트잇 추모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소수의 추모객이 놓은 몇 장의 종이였지만, 삽시간에 그 수가 불어났다. 추모의 언어는 애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문장이 곳곳에서 반복됐다. 이는 이 사건을 특정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 있었던 위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었다. SNS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겪었던 크고 작은 여성혐오 경험을 고백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그동안 개인적인 불쾌함이나 불안으로만 여겨졌던 경험들이 하나의 사회적 언어를 얻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흐름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빠르게 커졌다. 일부 남성 이용자들과 몇몇 언론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는 것 자체에 강하게 반발했다. 피의자가 조현병 진단을 받은 이력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이는 정신질환의 문제이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강남역 추모 현장에 몰려가 '남성 혐오 반대'를 외치는 팻말을 들기도 했고, 온라인에서는 두 입장 간의 논쟁이 격렬한 언쟁으로 번졌다. 경찰과 검찰 역시 이 사건을 '정신질환에 의한 범행'으로 규정하는 데 무게를 실었다. 이는 수사기관이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이후 재판 결과는 물론, 사회적 해석의 방향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지점이었다. 그런데 이 대립은 단순히 '조현병이냐 여성혐오냐'라는 이분법으로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성단체와 상당수 전문가들은 정신질환과 여성혐오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해도, 그 병증이 왜 하필 '여성'이라는 특정 대상을 향해 발현됐는가는 별개의 질문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정신질환이 범행의 원인 중 하나였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범행 대상을 여성으로 한정한 이유까지 설명해주지는 않는다는 논리였다. 이 지점은 이후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논쟁의 핵심 구도가 됐다. 사건의 진짜 성격을 둘러싼 이 물음은,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재판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진행됐다. 피고인 측은 심신미약 상태에서 벌어진 범행이라는 점을 주장했고, 검찰은 죄에 상응하는 무거운 처벌을 요구했다. 법원은 그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고 행동을 통제할 능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는 아니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법원은 심신미약 감경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을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법부는 개인의 정신 상태와 책임 능력을 중심으로 사건을 판단했을 뿐, 사회적 해석의 몫까지 떠안지는 않은 셈이었다. 바로 이 지점, 즉 법이 답하지 않은 질문이 사회에 남겨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사건이 이후에도 오래 회자된 이유였다. 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논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분기점으로 기록됐다. 이전까지 소수의 여성학 연구자나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만 논의되던 개념이, 이 사건을 계기로 신문 사설과 방송 토론, 국회 발언대까지 올라갔다. 동시에 이 사건은 이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여러 논쟁의 원형이 됐다. 여성 대상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이것이 여성혐오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쟁이 반복됐고, 그 논쟁의 문법 자체가 강남역 사건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논자들은 이 사건이 이듬해부터 확산된 미투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피해와 두려움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말하기 시작한 언어가, 이 사건을 통해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은 사회 안전과 관련한 실질적인 변화로도 이어졌다. 남녀 공용 화장실의 위험성이 새삼 부각되면서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건물주들이 공용화장실을 남녀 분리형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됐고, 여성 안전을 다룬 정책 논의가 활발해졌다. 또한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관리 체계의 허점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피의자가 과거 여러 차례 병원 치료와 강제 입원을 거쳤음에도 지역사회에서 별다른 관리 없이 방치됐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는 정신질환자 치료·관리 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결국 이 사건은 여성혐오 논쟁만이 아니라, 정신건강 정책의 공백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이 사건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던져진 핵심 질문, 즉 '그는 정말 여성이 미워서 죽였는가'라는 물음에 완전한 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법원은 책임 능력을 물었을 뿐 동기의 사회적 성격을 규정하지 않았고, 수사기관과 시민사회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사건을 설명했다. 어쩌면 이 사건이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유는 그 답이 명쾌하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싸고 한 사회가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 편견, 그리고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이 이 사건이 남긴 진짜 무게일 것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트잇은 이제 대부분 떼어졌지만, 그날 그 벽 앞에 서서 눈물을 훔치던 사람들의 질문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2016년 9월 12일 저녁 7시 44분,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의 아파트 단지에서는 저녁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갑자기 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천장의 조명이 흔들렸다. 몇몇은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인 줄 알았고, 몇몇은 위층에서 뭔가를 떨어뜨렸나보다 하고 넘겼다. 흔들림은 몇 초 만에 멎었다. 사람들은 다시 밥그릇을 들었고, 텔레비전 소리는 계속 흘러나왔다. 그런데 정확히 48분 뒤, 그보다 훨씬 강한 두 번째 흔들림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아무도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다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날 밤, 경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반도 관측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첫 흔들림은 전조였다. 기상청은 이를 규모 5.1의 전진(前震)으로 기록했다. 진앙은 경주시 남남서쪽, 내남면 부근의 지하 약 15킬로미터 지점이었다.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돌리던 그 48분 사이, 지하에서는 단층이 다시 크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밤 8시 32분, 규모 5.8의 본진이 발생했다. 이는 1978년 기상청이 근대적 지진 계기 관측을 시작한 이래 한반도에서 관측된 가장 강한 지진으로 기록됐다. 진동은 경주는 물론 부산, 대구, 울산을 지나 멀리 서울에서도 체감될 정도로 퍼져나갔다. 전국 각지에서 “건물이 흔들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는 신고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지진 직후 가장 먼저 눈에 띈 피해는 경주 시내 낡은 건물들에서 나타났다. 오래된 주택의 기와가 우수수 떨어져 골목에 흩어졌고, 상가 건물 외벽에 금이 갔다. 신라 천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주에서는 문화재 피해도 우려됐다. 첨성대는 기울기가 미세하게 더 커진 것으로 조사됐고, 첨성대를 비롯한 일부 석조 문화재에서 균열과 낙석이 확인됐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다행히 인명 피해로 이어질 만한 대형 붕괴는 보고되지 않았지만, 20명 안팎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놀라서 넘어지거나 대피 과정에서 다친 경우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날 밤 진짜 공포는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다. “한국은 지진 안전지대”라는 오래된 믿음이 그 순간 깨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지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잠옷 바람으로 놀이터에 모여 앉아 밤을 지새웠고, 부산과 대구의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는 고객들이 매장 밖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통신사 서버는 안부를 확인하려는 전화와 문자로 마비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정부의 긴급재난문자였다. 본진이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재난문자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실제 체감 진동으로부터 알림 문자가 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9분 안팎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지진이라는 재난의 특성상 그 몇 분이 뼈아픈 공백으로 느껴졌다. SNS에는 “지진이 다 끝나고 문자가 왔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이 지연은 이후 재난 문자 발송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지만, 그 밤에는 그저 무방비 상태의 국민들이 스스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불안은 곧 다른 곳으로 옮겨붙었다. 진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월성 원자력발전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진 직후 한국수력원자력은 예방 차원에서 월성 원전의 일부 원자로 가동을 수동으로 정지시켰다. 방사능 유출 등 심각한 이상은 없었다고 발표됐지만, 국내 최대 원전 밀집 지역 중 한 곳이 규모 5.8 지진의 진앙과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공포를 안겼다. 그동안 원전 안전성 논의에서 지진은 늘 “확률이 낮은 변수”로 취급돼 왔다. 그 전제가 그날 밤 통째로 흔들린 셈이었다. 지질학자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일었다. 경주 지진을 일으킨 단층은 양산단층대에 속한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 단층대는 오래전부터 존재가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지진 활동성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왔다. “한반도는 지각판 경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큰 지진이 드물다”는 통념이 있었지만, 이번 지진은 그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례였다. 더구나 본진 이후에도 지진은 멈추지 않았다. 크고 작은 여진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어졌고, 그해 안에만 수백 차례의 여진이 관측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주 시민들은 몇 주 동안 밤마다 다시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잠을 설쳐야 했다. 그런데 이 모든 소동이 가라앉을 무렵, 정말로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했던 질문은 따로 있었다. “이 지진이 정말 수백 년, 수천 년에 한 번 있을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였을까.” 당시에는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부와 학계는 “당분간 이 정도 규모의 지진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는 취지의 설명을 내놓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론의 관심도 점차 다른 이슈로 옮겨갔다. 경주는 서서히 일상을 되찾았고, 무너진 기와와 갈라진 담장은 하나둘 보수됐다. 하지만 그 답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 1년여 뒤인 2017년 11월, 이번에는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경주 지진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진원의 깊이가 훨씬 얕았던 탓에 지표면에 전해진 충격은 더 컸고, 건물 붕괴와 대규모 이재민이 발생하는 실질적 피해로 이어졌다. 두 지진은 서로 다른 단층에서 발생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남겼다. 한반도는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경주 지진은 예외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이 땅 밑에서 실제로 에너지가 쌓이고 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경주 지진이 남긴 것은 무너진 담장이나 깨진 기와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안전 감각에 생긴 균열이었다. 이 지진 이후 정부는 건축물 내진 설계 기준을 강화했고, 기존 건물에 대한 내진 보강 논의가 본격화됐다. 재난문자 발송 체계도 손질됐다. 지진 보험이나 대피 요령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집 안의 어느 위치가 그나마 안전한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원전과 활성단층의 거리를 둘러싼 논의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론화됐다. 첨성대는 신라시대 이래 크고 작은 지진을 여러 차례 견뎌내며 천 년 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2016년 9월의 그 밤에도 첨성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조금, 예전보다 더 기울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 미세한 기울기야말로 이 사건이 남긴 가장 정직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땅은 천 년이 지나도 완전히 멈춰 있지 않으며,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땅 밑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는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