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9. 21. PM 2:59:19 · 조회 0
1988년 9월 17일 오후, 잠실종합운동장의 트랙 위로 한 노인이 뛰어들었다. 흰머리에 마른 몸, 조깅복 차림의 그는 마지막 성화 주자로부터 불을 건네받아 관중석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10만 관중이 일어서서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손기정.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였던 그는 그날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올라야 했던 사람이었다. 52년 전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삼켰던 그 자리에, 이번에는 태극기 아래 서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 짧은 순간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그리고 이 거대한 축제가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이야기를 몇 년 전으로 되돌려야 한다.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였다. 당시 서울은 일본 나고야와 경쟁했다. 국력이나 도시 인프라, 스포츠 외교력 모두에서 나고야가 앞선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정주영 대한체육회장을 비롯한 유치단은 위원들을 한 명씩 접촉하며 설득을 이어갔고, 투표 결과 서울이 52대 27이라는 예상 밖의 큰 표차로 승리했다. 결과가 발표되던 순간 총회장에 있던 한국 관계자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안도가 동시에 스쳤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유치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 대회를 무사히, 그것도 성공적으로 치러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당시 세계는 냉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반발한 미국 등 서방 진영이 대거 보이콧하면서 반쪽짜리 대회로 전락했다. 4년 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그 보복으로 소련과 동구권이 불참했다. 두 대회 연속으로 올림픽은 온전한 세계 대회가 아니라 진영 대결의 무대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분단국가의 수도에서 열리는 다음 대회가 또 한 번 반쪽으로 쪼그라들 것이라는 우려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게다가 서울은 냉전의 최전선, 북한과 휴전선을 마주한 도시였다.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이 도시까지 선수단을 보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정부와 체육계는 개최 결정 이후 7년 가까운 시간을 이 불안을 걷어내는 데 썼다. 외교 라인을 통해 동구권 국가들과 조용히 접촉을 이어갔고, 스포츠 교류를 명분으로 관계를 조금씩 트기 시작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선수촌과 경기장을 새로 짓고 한강 종합개발 등 도시 정비 사업이 속도를 냈다. 서울의 스카이라인과 도로망이 이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것을 당시 시민들도 체감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설을 완벽하게 지어도, 정작 각국 선수단이 오지 않는다면 그 모든 준비는 무의미해질 수 있었다. 개최지가 결정된 순간의 환호와는 달리, 그 이후의 시간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나날이었다. 그 살얼음판이 가장 위태로워진 것은 대회를 채 1년도 남기지 않은 1987년 11월이었다.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수사 과정에서 북한 공작원으로 지목된 남녀 두 명이 붙잡혔고, 이 가운데 한 명이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진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으로 대회 개최 자체에 대한 안전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서울 방문을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개최지 서울로서는 단순히 시설을 잘 짓는 문제를 넘어, 정말로 이 대회를 안전하게, 그리고 온전한 형태로 치러낼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대회를 코앞에 둔 시점까지도 완전한 참가를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북한은 결국 불참을 선택했고, 이에 동조해 쿠바, 에티오피아, 니카라과, 알바니아 등 몇몇 나라도 불참을 결정했다. 그러나 정작 세계가 주목한 것은 불참국이 아니라 참가국이었다. 소련과 동독,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 주요 국가들이 잇따라 서울행 선수단 명단을 발표했다. 모스크바 대회와 LA 대회에서 반씩 갈라졌던 세계가 서울에서만큼은 거의 온전히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최종적으로 160개국 넘는 나라의 선수들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는 그때까지 열린 어떤 올림픽보다도 많은 참가국 기록이었다. 분단의 최전선에 있는 도시에서, 냉전으로 두 번이나 쪼개졌던 올림픽이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9월 17일 오후, 잠실주경기장의 개막식이 시작됐다. 각국 선수단이 알파벳 순서로 입장하는 동안 관중석은 소련과 미국 선수단이 차례로 등장할 때마다 비슷한 크기의 함성으로 호응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장면이었다. 개막식 프로그램 중에는 어린이가 큰 굴렁쇠를 굴리며 텅 빈 경기장 트랙을 홀로 가로지르는 순서가 있었다. 소음도 구호도 없이, 오직 한 아이와 굴렁쇠, 그리고 정적만이 존재하는 그 짧은 장면은 세계 각국의 중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화려한 구호나 대규모 군무 대신 침묵과 여백으로 채운 이 장면은 이후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오래 회자됐다. 그리고 성화가 경기장에 들어왔다. 마지막 봉송 주자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손기정이었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세계 최고 기록으로 우승했지만, 일제강점기였던 그 시절 그는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출전 등록이 되어 있었다. 시상식에서 억지로 걸린 일장기를 가리려 월계수 가지로 가슴을 가렸던 그의 사진은 이후 한국 근현대사에서 잊히지 않는 이미지로 남았다. 52년이 지나 그는 자신의 조국 수도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마지막 성화 주자로 다시 트랙에 섰다. 성화대에 불을 올리기 직전 그는 잠시 멈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짧은 정지의 순간, 경기장을 채운 10만 관중의 함성이 한층 더 커졌다고 당시 현장을 지켜본 이들은 전한다. 노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는 사실도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개막식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코리아나가 부른 주제가 손에 손잡고였다. 언어와 진영을 가리지 않고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노래는 대회 기간 내내, 그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서울올림픽을 상징하는 소리로 남았다. 전 세계에서 모인 선수들이 서로 다른 국기를 들고 같은 트랙 위에 서서 이 노래를 함께 듣는 장면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반쪽으로 쪼개지던 올림픽이 다시 온전한 하나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대회는 이후 16일 동안 이어지며 여러 기록을 남겼다. 한국은 종합순위 4위에 오르며 이전 대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성적을 냈고, 세계 각국 선수들과 취재진, 관광객이 서울 곳곳을 오가며 이 도시의 모습을 세계에 전했다.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시 정비와 시설 확충에 따른 여러 갈등과 그늘도 분명 존재했지만, 적어도 개막식이 열리던 그 순간 잠실의 밤공기를 채운 것은 안도와 자부심이었다. 불과 한 세대 전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나라가,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한 분단국의 수도에서 세계를 하나로 불러 모으는 무대를 완성해낸 것이다. 손기정은 이후에도 여러 국제 스포츠 행사에 얼굴을 비쳤고, 20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 스포츠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지켰다. 그가 성화대 앞에서 잠시 멈춰 손을 흔들었던 몇 초는 지금도 서울올림픽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소환되는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그 짧은 정지는 한 개인의 오랜 설움이 풀리는 순간이었을 뿐 아니라, 폐허에서 일어선 한 나라가 세계 앞에 스스로를 증명해낸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도 9월이 되면 이날의 기록이 다시 소환되는 것은, 그 몇 초 안에 한 사람의 인생과 한 나라의 시간이 함께 응축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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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참조 기사들을 바탕으로 다시윤슬이 다시 정리해서 쓴 글이에요. 미제 사건이나 확정되지 않은 혐의는 단정하지 않고 서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