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9. 7. AM 9:37:55 · 조회 2
2015년 5월, 경기도의 한 병원 응급실 앞에는 열과 기침을 호소하는 68세 남성이 앉아 있었다. 그는 얼마 전 바레인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를 오간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챈 의료진은 없었다. 그는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며 진료를 받았고, 그때마다 의사들은 감기나 폐렴 정도로 짐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왜 이 흔한 감기 같은 증상이, 훗날 한국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사태의 시작점이 되었을까. 그가 겪던 병의 정체는 중동호흡기증후군, 이른바 메르스(MERS)였다. 낙타에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 바이러스는 그때까지 중동 지역 바깥에서는 큰 유행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첫 확진 판정이 나온 것은 그가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지 열흘 넘게 지난 5월 20일이었다. 그 사이 그는 지역의 의원과 병원 여러 곳을 거쳤고, 응급실과 입원실에서 수많은 환자·보호자·의료진과 접촉했다. 첫 확진 소식이 알려졌을 때 방역 당국은 접촉자 수를 파악하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가 다녀간 병원이 어디였는지조차 초기에는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건 당국은 “불필요한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환자가 경유한 의료기관 명단을 곧바로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판단은 곧 역풍을 맞았다. 병원 이름을 모르는 시민들은 자신이 그 병원에 다녀왔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어느 병원이 위험한지 알 수 없으니 오히려 모든 병원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퍼졌다. 이 불투명함이 이후 사태를 키운 첫 번째 균열이었다는 지적은 사태가 진정된 뒤에도 오래 남았다. 확산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예상 밖의 경로로 번져나갔다. 첫 환자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같은 병실을 쓰던 환자들, 문병을 온 가족들이 잇따라 감염됐다. 그중에는 서울의 한 대형 종합병원 응급실을 거쳐 간 환자도 있었다. 훗날 ‘슈퍼전파자’로 불리게 되는 이 환자는 좁고 혼잡한 응급실에 며칠간 머물렀고, 그 며칠 사이 같은 공간에 있던 수십 명이 바이러스에 노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응급실 하나가 도시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감염망의 진원지가 된 셈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왜 한국의 병원에서는 이렇게 쉽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감염될 수 있었을까. 6월에 접어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확진자가 발생한 병원들이 부분 또는 전면 폐쇄됐고, 격리 대상자는 수천 명 단위로 늘어났다. 전국의 학교 수천 곳이 휴업에 들어갔고, 놀이공원과 대형 마트에서 인적이 눈에 띄게 줄었다. 마스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약국 앞에 줄을 섰고, 일부 지역에서는 품귀 현상까지 빚어졌다. 중국인 관광객을 태운 크루즈선이 한국 기항을 취소하는 일도 벌어졌다. 도심 곳곳에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든 풍경은 그 자체로 낯설고 불안한 것이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점점 커졌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브리핑에 나설 때마다 “왜 병원 이름을 공개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서울시장이 정부보다 앞서 특정 병원 관련 정보를 전격 공개하는 이례적인 상황도 벌어졌다. 결국 정부는 여론에 떠밀리듯 메르스 환자가 발생하거나 경유한 병원 명단을 뒤늦게 전면 공개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합동조사단을 파견해 현장을 점검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의 의료 환경에 존재하던 구조적 문제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문제의 핵심은 다인실 병실과 붐비는 응급실이었다. 당시 한국의 종합병원 병실 상당수는 4~6인실 이상의 다인실 구조였고, 환자와 보호자, 문병객이 한 공간에 뒤섞여 지내는 것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응급실 역시 병상 부족으로 환자들이 복도까지 나와 대기하는 일이 흔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한 사람의 호흡기 비말이 순식간에 여러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 특유의 이른바 ‘닥터 쇼핑’ 문화, 즉 증상이 낫지 않으면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니며 진료를 받는 관행도 감염 경로를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하게 만든 요인으로 지목됐다. 첫 환자가 여러 병원을 전전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기에 병원 간 정보 공유 체계의 미비함이 겹쳤다. 한 병원에서 의심 증상을 보인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옮겨갈 경우, 그 병원은 이전 병력이나 접촉력을 곧바로 알 방법이 없었다. 응급실 의료진이 환자의 해외 여행력을 묻는 절차 자체가 표준화돼 있지 않았던 점도 초기 발견을 늦춘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결국 이 사태를 키운 것은 바이러스의 특별한 위력이라기보다, 이런 여러 겹의 허점이 하필 한 사람의 동선 위에서 동시에 맞물린 결과에 가까웠다. 7월 들어 신규 확진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정부는 사실상 사태의 안정화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한 종식 선언이 나온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2월이었다. 그해 국내에서 메르스로 확진된 사람은 정부 공식 집계로 186명, 그중 38명이 숨진 것으로 발표됐다. 격리 대상에 올랐던 사람은 한때 만 명을 훌쩍 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발원지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더 큰 규모의 유행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 병의 위험성이 병원체 자체보다도 그것을 맞이한 의료 시스템의 준비 상태에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두고두고 언급됐다. 사태가 지나간 뒤 한국 사회는 여러 방향에서 이 경험을 되짚었다. 감염병 위기 대응 체계가 전면적으로 재정비됐고, 질병관리본부의 권한과 인력이 확대됐다. 병원들은 응급실 혼잡도를 줄이기 위한 개편에 나섰고, 다인실 위주였던 병실 구조도 점진적으로 개선 논의가 이뤄졌다. 감염병 발생 시 정보를 신속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원칙도 이때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리를 잡았다. 무엇보다 역학조사와 동선 추적, 격리와 검사 체계를 다루는 실무 경험이 이 시기에 쌓였다는 점은 훗날 다시 언급될 사실이었다. 5년 뒤인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쳤을 때 한국이 비교적 신속하게 진단 검사 체계를 갖추고 동선 추적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15년의 뼈아픈 실패가 있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당시엔 병원 이름 하나 공개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던 나라가, 훗날 방역 대응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나라가 된 셈이다. 그해 여름, 마스크를 구하러 줄을 서던 사람들과 텅 빈 응급실 복도를 떠올리는 이들에게 메르스 사태는 여전히 하나의 질문으로 남아 있다. 다음 위기가 왔을 때, 우리는 정말 그때와 다르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