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8. 26. AM 10:11:45 · 조회 12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 무렵, 서울 성동구와 강남구를 잇는 성수대교 위에는 여느 아침처럼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등교하는 학생들을 태운 통학버스, 출근길 승용차, 화물차들이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신호를 기다리거나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아래로는 짙은 갈색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위로는 서울의 흔한 출근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 초 뒤, 다리의 일부가 그대로 허공으로 꺾여 떨어졌다. 상판 약 48미터가 순식간에 강으로 곤두박질쳤고, 그 위에 있던 차량들도 함께 추락했다. 완공된 지 15년밖에 되지 않은 다리가, 대체 왜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런 식으로 끊어져 버린 걸까. 성수대교는 1979년에 준공된, 당시로서는 서울의 교통난을 해소할 주요 한강 다리 중 하나였다. 트러스 구조로 지어진 이 다리는 강북과 강남을 잇는 실핏줄 같은 역할을 하며 매일 수만 대의 차량을 실어 날랐다. 붕괴가 일어난 그날 아침도 다르지 않았다. 다리 북단 쪽 상판에 서 있던 차량들 중에는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태운 통학버스가 있었다. 버스는 다리가 꺾이면서 그대로 한강으로 떨어졌고, 인근을 지나던 다른 승용차와 트럭들도 함께 추락했다. 순식간에 다리 위는 텅 빈 채 끊어진 상판만 남았고, 강물 위로는 부서진 차량과 사람들이 흩어져 있었다. 사고 직후 서울은 충격에 빠졌다. 아침 뉴스는 속보로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했고, 시민들은 처음엔 오보가 아닐까 되물었다고 전해진다. 소방과 경찰, 해군까지 동원된 구조 작업이 곧바로 시작됐다. 다리 아래 강물 속에 잠긴 차량을 끌어올리고, 부상자를 실어내는 작업이 몇 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이 사고로 32명이 목숨을 잃고 17명이 다쳤다고 알려져 있다. 사망자 중에는 등교하던 학생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 사실은 이후 사고를 두고두고 사회적으로 되새기게 만든 이유가 됐다. 평범한 아침, 평범한 통근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점이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했다. 사고 원인을 둘러싼 궁금증은 곧바로 터져 나왔다. 다리는 특별한 자연재해나 충격 없이 스스로 끊어졌다. 지진도 없었고, 폭발도 없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다리 자체에 있다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 다리가 15년 전에 지어진,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의 기술력을 갖춘 구조물이었다는 점이었다. 언론과 여론은 곧 부실공사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준공 당시 시공을 맡았던 건설사, 그리고 이후 다리를 관리해온 서울시의 유지보수 체계에 대한 의문이 쏟아졌다. 다리가 무너지기 전 균열이나 이상 징후가 있었는지, 점검이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두고 여러 추측이 나왔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 사고 현장에서 수거된 트러스 구조물의 잔해를 분석하는 작업이 이어지면서, 조사 당국은 붕괴의 실마리를 하나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다리의 상판을 지탱하던 트러스 연결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이 연결부는 강철 부재들을 용접이나 볼트로 결합해 하중을 분산시키는 핵심 부위였는데, 시공 당시 이 부위의 용접이 부실하게 이뤄졌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즉, 다리가 처음 지어질 때부터 이미 결함을 안고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된 차량 하중, 특히 기준을 초과한 과적 화물차의 통행이 서서히 그 취약한 부위에 피로를 축적시켰을 가능성도 함께 지목됐다. 조사가 이어지는 동안 시민들의 분노는 다른 방향으로도 향했다. 다리 하나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특히 성수대교가 다른 한강 다리들과 함께 정기적인 안전점검 대상이었음에도 이런 결함이 사전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은 큰 논란을 낳았다. 점검이 형식적으로 이뤄졌던 것은 아닌지, 혹은 점검 기준 자체가 허술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이어졌다. 이 무렵 정부 책임론도 거세지면서, 당시 국무총리와 서울시장 등 관련 책임자들이 이 사고의 여파로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조사 결과 드러난 것은, 성수대교의 붕괴가 어느 한 가지 원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여러 겹의 부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라는 사실이었다. 시공 당시 트러스 연결부 용접이 설계 기준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준공 시점부터 다리에 구조적 취약점을 남겼다는 것이 유력하게 지적됐다. 여기에 이후 15년 동안 이뤄진 유지관리와 안전점검이 이 취약점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고, 기준을 넘어서는 화물차들의 반복적인 통행이 서서히 균열을 키웠을 가능성이 더해졌다. 다시 말해 이 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만들어낸, 그리고 사람이 막을 수 있었던 붕괴였다는 것이 이후 조사와 사회적 평가를 통해 드러난 진실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게 아니라, 누군가의 방심과 소홀함이 쌓여 무너진 것이었다. 이 사고는 이후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이듬해인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뒤따르면서, 성수대교 붕괴는 삼풍 사고와 함께 1990년대 한국의 급속한 성장이 안고 있던 부실공사와 안전불감증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함께 언급되곤 한다. 두 사고를 계기로 시설물의 안전관리를 법적으로 강화하는 제도가 마련됐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정기 안전점검 체계의 출발점이 됐다고 평가된다. 붕괴된 성수대교는 이후 다시 건설되어 지금도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해 가을 아침, 등교하던 학생들과 출근하던 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일은, 우리가 매일 무심히 건너는 다리와 길 아래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되묻게 만드는 질문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